겸재 정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배워야 할 겸재 정선의 겸허한 지혜
- 금강전도_금강산을 세 번밖에 방문하지 않았는데 이처럼 완벽한 일만이천봉을 표현해냈다
- 세검정_칼을 씻는 정. 다양한 위치와 시각으로 바라보는 정자의 모습이 인상깊다
<겸재정선, 붓으로 조선을 그리다>의 저자 이석우 겸재정선 미술관장
조선시대와 우리 미술사를 풍미한 화가 겸재 정선에 대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면 ‘진경산수화’라는 대답이 나올 것이다. 보이는 그대로 그려낸 실경산수화와는 달리 우리 강토에 자신의 감정을 넣어 구도와 배치 등 새롭고 과감하게 표현한 진경산수화, 이 화풍의 대가로 여겨지는 겸재 정선은 기존 조선의 문화 속에서 혁신적인 화풍을 이끌어낸 최초의 근대적인 화가이자 아방가르드로 묘사되곤 한다.
이러한 겸재 정선을 재조명한 서적이 최근 발간되었는데 “겸재 정선, 붓으로 조선을 그리다”가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의 저자이자 겸재정선미술관의 관장으로 재직 중인 이석우를 만나보았다.
Q. 안녕하세요 이석우 관장님. “겸재 정선, 붓으로 조선을 그리다” 발간을 축하드려요. 책을 펴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A. 역사를 연구하는 교수로 그것에 젖어 지내다가 또 퇴직을 하고나서는 겸재정선미술관에서 관장으로 지내며 겸재정선이라는 인물을 가까이하게 된 것은 제게 큰 행운이었습니다. 학문을 연구하는 자로서 숱한 학술대회와 회의를 참여하며 다양한 전문가들을 만나고 또 그들의 연구결과를 공유할 수 있는 것은 큰 보람이자 기쁨이지요. 그러는 중 이렇게 좋은 연구 결과를 접하게 되면 학자들끼리만 공유할 것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도 알려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필요성을 느꼈어요. 전문화된 문서를 대중화하기 위해서는 좀 더 쉽고 재미있게 풀어내야 했고, 그 결과로 이 책이 탄생한 것 같습니다.
Q. 겸재정선미술관의 관장으로 재직하시며 누구보다 겸재정선과 각별하게 지내셨을 것 같습니다. 책을 쓰시면서 경험하신 다양한 이야기를 말씀해주세요.
A. 겸재정선미술관이 위치한 이 곳 양천향교 근처는 과거 정선이 현령으로서 관직을 지냈던 당시 양천현이라 불리우던 지역입니다. 정선이 이 곳에서 지내며 많은 그림을 남겼는데 <경교명승첩> 그림과 현재 지역의 모습을 비교하는 재미가 있답니다. 특히 <경교명승첩>은 한강을 본격적으로 그렸고 <연강임술첩>과 <양천8경>은 예술사에 남을 위대한 작품들입니다. 또한 서울의 광화문이나 경복궁, 압구정 등에도 겸재정선의 발자취가 느껴지는 지역이 꽤 많이 있어요. 글을 쓰면서 겸재의 그림을 나침반 삼아 다양한 지역을 다녀보았는데, 비록 몇 백 년 전의 인물이지만 우리가 같은 땅 위에 서서 소통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겸재 그림의 현장을 지금도 찾아가면 당대의 역사를 만나게 합니다.
Q. 책을 읽다보니 관장님께서 현재 해당 지역의 모습을 직접 찍으신 사진이 실려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책이 출간된 후의 반응은 어떤가요?
A.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아마 우리 고급 취향의 대중들이 그동안 이런 성격의 인문학적 갈증을 느껴 온 것이 아닐까 싶어요. 좋은 타이밍에 저의 책이 선보여진 거겠지요.
Q. 겸재정선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A. 겸재는 사대부가의 자손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3대째 벼슬을 하지 못한 관계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그리고 화가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것이 40대 초반입니다. 그 당시 평균 수명이 40세 초반인 것에 비하면 굉장히 늦은 출세인 셈이지요. 게다가 관직에 오른 것도 그가 41세였을 때니, 요즘과 비교하여 한 번 상상해보세요. 남들이 수명을 다할 나이에(조선시대 평균수명 40세) 비로소 관직에 오르고 유명해지기 시작하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웃음)
Q. 네 맞아요. 그러고도 40년을 더 살아 84세의 수를 누렸다는 사실도 정말 굉장한 것 같습니다.
A. 그의 어머니도 90세가 넘어서까지 산 것을 보면 겸재가 장수한 것은 어쩌면 유전적인 요인이 큰 것 같습니다. 사실 40대가 될 때까지 출세하지 못했다는 것(출세의 기미도 안 보인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기다림이었을 것입니다. 요즘 시대에도 희망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태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겸재는 꾸준히 그림을 그리고 또 학문을 하여 결국 관직에도 오르고 유명한 화가도 될 수 있었습니다. 기다리며 준비하면 언젠가 기회가 오리라 믿습니다.
Q. 겸재가 포기하지 않고 노력을 지속한 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닦는 그의 부지런한 성향때문인 걸까요 아니면 언젠가 꿈을 펼치리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일까요?
A. 제가 생각하기에 겸재는 상당히 희망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비록 미래가 불투명할지라도 언젠가 다가올 기회를 잡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며 내공을 쌓은 것이지요.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겸재정선이 된 것이라고 생각해요.
Q. 겸재 정선이 41세에 처음으로 올랐던 관직이 “관상감 천문학 겸교수”라고 들었습니다.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A. 관상감 천문학 겸교수라는 관직은 당시 서양문물과 과학 또는 화풍을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던 자리입니다. 겸재가 살던 시기는 17세기에서 18세기가 넘어가는 시대로 가까이는 명과 청의 교체기였고, 멀리 내다보면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인 볼테르와 동시대를 산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우리 역사를 생각하면 정적이고 고요한 조선시대이지만, 전세계적으로는 굉장한 변화가 이루어진 역동기라고 볼 수 있지요. 이 시기에 관상감 겸교수의 자리에 있으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다양한 문물을 접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겸재가 표현했던 과감하고 창의적인 화풍에 대해 그동안은 ‘내재적 발전론’에만 근거하여 겸재 스스로가 창조해냈다고 여겨져왔지만, 여러 역사적 사실들을 비교해본 결과 당시 겸재가 올랐던 관직에서 서양화법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Q. 새롭게 접한 문화를 자신의 그림에 흡수시켜 새로운 화풍을 만들어냈다는 말씀이시군요.
A. 그렇지요. 다른 문화를 자신의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재창조하는 자세가 상당히 현대적인 것입니다. 타문물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또는 온전히 배척했다면 지금의 겸재에 대한 평가는 없었겠지요.
Q. 겸재정선에게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지혜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A. 먼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겸허한 정신이 우리가 본받아야할 첫 번째라고 봅니다. 또한 나와는 다른 것을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여 재해석 재창조하는 창의성은 우리 현대인이 배워야 할 지혜로운 자세이고요. 마지막으로 높은 벼슬에서도 다작의 끈을 놓지 않는 겸손의 미덕도 중요합니다.
Q. 조선의 화가 겸재 정선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러 찾아뵈었는데 오히려 현대인인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겸재의 모습을 더 많이 배운 것 같습니다. 겸재정선에 대한 서적이 2편, 3편으로 출간되어 시리즈로 제작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또한 겸재정선 미술관을 방문하는 어린 아이들을 위한 재미있는 동화책으로도 출간되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A.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요. 대중들과 우리 학생들이 우리나라 역사와 예술에 관심을 갖고 겸재정선에 대해 더욱 흥미를 가져 예술의 시대에 좋은 삶의 자세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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