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어제내일 2017. 2. 22. 22:03

안해영

 


 ‘반중(盤中) 조홍(早紅) 감이 고아도 보이 나다

유자(柚子) 안이라도 품음 즉 하다마는

품어 가 반기리 업슬새 글로 설워 하나이다’


  다른 감보다 붉게 잘 익은 감을 가져가도 반가워해 주실 부모님이

안 계시니 그것이 서럽다. 조선 시대 박인로(朴仁老, 1561∼1642)가 지

은 <조홍시가(早紅柹歌)>에 나오는 감처럼 가을날 붉은 감은 내게도

어머니를 생각나게 하는 과일이다.

  바닷가로 나가는 길섶 붉은 황토밭 언저리에 키 큰 감나무 한 그루

가 있었다. 감꽃이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봄날이면 감나무 아래로

달려가 뽀얗고 앙증스러운 감꽃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걸고 뽐내며 즐

거워했다. 가을이면 감의 개수만큼 쳐다보는 눈길이 감나무에 머물

렀고, 따고 싶고 먹고 싶은 마음이 여린 가슴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이웃에 사는 감나무 주인은 그 많은 감으로 사람도 들어갈 수 있을

만치 큰 항아리에 담아 우린감을 만들었다. 우린 감을 우리 집에도

조금 나누어 주었지만, 감질만 났다. 동네에 유일한 감나무여서 또래

아이들도 침만 삼켰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 떨어진 감을 줍기라도 할라치면 어머니는 못

마땅하게 여겨 꾸짖곤 하였다. 실컷 먹일 수 없는 애처로운 마음 때문

이었을까? 양손에 들린 땡감을 내려놓으라던 어머니의 눈가에 풋감

같은 물기가 맺히는 것을 설핏 보았다. 손에 쥔 감을 슬그머니 내려놓

는 내 눈에도 공연히 눈물이 맺혔다.

  도시로 전학을 온 뒤 또 다른 감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과일 가게

마다 산더미 처럼 쌓여 먹음직스럽게 진열되어 있는 감은 황토밭 언

저리 감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 하굣길 과일 가게 앞에 멍하니 서서

빨간 감을 바라보면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궁색한 주머니를 뒤져

봐야 전차표만 잡힐 뿐. 가끔은 슬쩍 챙기고 싶은 욕망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럴 때면 망연히 서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고, 떨

어진 감을 줍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던 어머니의 꾸지람이 진열된 감

위에 얹혔다.

  어느 가을 직장 동료의 고향에 감 풍년이 들어 십시일반 도와주어야

한다며 직원들이 감을 단체로 구매한 일이 있었다. 홍시(紅柿) 두 상

자를 구매하여 고향으로 보냈다. 어머니는 그때 홍시를 얼마나 맛있

게 잘 먹었는지 모른다고 두고두고 말했다. 어머니가 감을 그렇게 좋

아하는 것을 그때야 비로소 알았다.

  달고 떫고 시며 찬 성질을 가진 감은 몸의 열기도 식히고 폐에 진

액을 보충해 기침을 멈추게 한다고 한다. 계피와 생강을 달인 물에 곶

감과 잣을 넣은 수정과를 감기가 잘 걸리는 겨울에 가끔 담가 먹었다.

그뿐만이 아니고 토사곽란이 났을 때도 응급 처치로 곶감 달인 물을

약처럼 마시기도 했다. 곶감도 유행을 타는지 요즘은 단단한 곶감보

다 말랑말랑한 곶감이 인기가 더 좋다.

  2000년 밀레니엄 해 봄에 서울 근교 일산에 주택을 지어 어머니와

함께했다. 봄비에 젖은 마당이 붉은 진흙으로 질척이는데 어머니와

텃밭과 꽃밭을 만들었다. 울타리에는 감나무를 심고 싶었다. 홍시를

좋아한 어머니와 그 옛날 황토밭 언저리의 감나무가 생각나서였다.

어머니도 울타리 유실수는 가을이면 예쁜 단풍도 볼 수 있으니 좋겠

다고 하여 감나무 세 그루를 심었다.

 추억 속 황토밭 감나무는 태풍으로 밭 언저리가 무너지면서 유실

되었다고 어머니가 감나무를 심을 때 말해주었다. 어머니를 한 달 정

도 모셨을 무렵 음식을 잘 잡수지 못해 진찰을 받았더니 노환이라고

했다. 감이 여물어 가던 여름 어머니는 고향에서 잠시 앓다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와 함께 심어 잘 자라고 있는 감을 보면 문득문득 어머니 생

각이 났다. “남의 것에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라며 풋감 같은 떫은

말로 교육을 하던 어머니였다. 익은 감의 단맛 같은 성품으로 자라고

싶었지만, 어머니에겐 떫은맛의 자식으로만 보이지는 않았는지. 자식

들이 잘 익은 감처럼 되기를 얼마나 기다렸을까? 방황하는 자식들의

사춘기 모습을 보면서 언제 떫은맛이 없어질까 기다리고 또 기다리

며 우린 감이라도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울타리의 감이 익어갈 즈음 서울로 이사를 왔다. 감나무와 정원을

돌보며 사는 중년의 아주머니가 뜻밖에 감을 택배로 보내왔다. 심어

놓고 생각만 하던 감을 받고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항아리에 켜켜이

볏짚을 깔고 숙성을 시켰다. 한참 후에 항아리를 열어보니 감이 잘 물

러 있었다. 먹기 좋게 무른 감처럼 황토밭 땡감에 대한 추억도 어머니

에 대한 그리움도 추억이 되고 있다.

  감나무 아래서 낙과를 줍던 어린 시절 “남의 것은 욕심내는 것이

아니고 잘 지켜 주어야 한다.”라고 당부하던 어머니의 바람대로 나는

살고 있는 것일까? 어머니 가슴에 떫은맛의 자식으로 남아 있지는 않

았을까?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가가 불그스레해진다. 무언가 해드리

고 싶어도 다 필요 없다며 손사래를 치며 “너희들이나 잘 살면 된다.”

라고 말씀하던 어머니! 이제는 차가운 곳에 누워계셔 '한 아름 품어

가 반기리 업슬새 글로 설워 하나이다.'<選>


                                                 《에세이문학》(2017. 봄)

《선수필》(2017. 가을)106-109p


2016년 한국산문 등단

한국산문작가협회회원

anhaiyoung@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