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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 팸투어 원고 부잔교 앞에서 2016. 11.
부잔교 앞에서
안해영
부잔교 앞에는 나락 가마니가 산더미 같이 쌓여 있다. 나락 가마니들은 어딘가로
끌려가기 위해 대기 순번을 기다리듯 가지런히 줄을 서 있다. 가마니 속의 나락은
일본으로 실려 가는 것을 모르고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기 위해 줄을 서 있는가
요?”라며 묻고 있는 듯 보였다.
가을 추수를 하면 볏단들이 마당 한쪽에 차곡차곡 쌓여 거대한 산을 만들었다. 동
네 아저씨의 지게에 실려 집으로 온 볏단들이 쌓이면 다음 순서는 탈곡 차례였
다. 사촌인 큰 집만 동네에서 유일하게 탈곡기를 가지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벼
농사가 끝났지만, 탈곡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마당이 좁은 집들은 볏단을 집으로
들이지 못하고 논 한쪽에 쌓아 놓았다. 볏단을 쌓을 때면 알곡이 달린 부분은 안쪽
을 향해 둥그렇게 쌓았다. 혹여 비가 오거나 쥐 피해를 막으려는 방편이었다. 알곡
이 달린 볏단이 밖을 향했다가 비라도 오면 볏단에서 싹이 생길 수도 있어서 이를
방지하거나 벼를 훔쳐가는 쥐 피해를 막기 위함이었다.
탈곡기는 장년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페달을 동시에 같은 힘으로 밟았다. 두 손
은 볏단에서 가른 벼를 잡고 탈곡기에 대고 이리저리 뒤적이면 알곡들은 탈곡기 밖
에 있는 멍석으로 쏟아져 나왔다. 알곡이 된 나락을 머리에 수건을 두른 아낙들이
볏짚으로 만든 가마니에 담았다. 한 마지기 논에서 수확되는 나락은 4섬 정도 돼
었다. 80kg들이 두 가마니가 한 섬이다. 그것도 통일벼를 심은 다음의 수확
양이지 그 전에는 많아야 3섬 정도 되었다.
벼가 자라는 시기에 궂은날이 적어 농사가 풍년을 이루면 탈곡하는 날 그 결과가
나왔다. “올해는 알곡이 실해서 4섬이나 거뒀네.”라며 아버지는 너털웃음을 웃으
며 일하는 농부들에게 막걸리를 푸짐하게 내놓으라 어머니에게 특별히 말하기도 했
다. 그 알곡들은 나중에 막걸리의 원료가 되기도 했으니 술을 좋아하던 아버지가
더없이 기뻐했을 것은 자명한 이치다.
부엌에서 막걸리를 거르던 어머니는 일본이 점령하던 시기에 막걸리도 맘대로 담
그지 못했던 이야기며 쌀농사를 지어봤자 소용이 없었다는 말을 했다. 막걸리를 담
근 항아리를 부엌 한쪽에 있는 나무 청 밑에 구덩이를 파고 숨겼다고도 했다. 순사
들이 농사철이면 밀주 단속을 다녀 막걸리가 숙성될 때 나는 냄새 때문에 그렇게
감춰도 백발백중 들켰다고 했다. 순사가 온다는 소문이 돌면 들키지 않으려고 이
집 저 집에서 술 항아리를 이고 지고 산속으로 뛰며 감추러 다녔다고 한다. 산속으
로 감추러 가다가 항아리를 지고 뒹굴어 항아리가 깨지고 사람이 다치기도 했다고
한다. 힘들게 지은 벼농사를 일본인들이 모두 공출해 갔다고도 했다. 기껏 농사를
지어보아야 쌀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한다. 논 한 마지기에서 벼가 얼마나 수확이
되는지 그들이 다 꿰고 있어서 수확이 더 되어도 감출 수가 없었다고 한다. 풍년이
들거나 흉년이 들거나 그들은 농사짓는 농사꾼보다 더 자세히 수확량을 파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 시절 이야기를 할 때면 눈에 핏발이 서기도 했다. 외양
간이 방 뒤에 있어서 외양간 나무 청에 구덩이를 파고 숨긴 술 항아리를 들키기도
했다며 막걸리를 거르며 치가 떨리는 시대였다고 했다. 술항아리가 걸리면 밀주 법
에 의해 처벌을 받는 것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농사짓는 일꾼들에게 먹일 것이 없
어 마음이 더 아팠다고 했다. 막걸리 한 사발이라도 마셔야 기운이 나서 일할 맛을
느끼는 농촌 풍습을 거두어 버린 그들의 횡포 앞에 좌절이 더 크게 왔던 것 같아
보였다.
군산항 부잔교 앞에서 일본으로 실려 가기를 기다리는 사진 속의 쌀가마니들을 보
니 어머니가 들려줬던 이야기들이 쌀가마니 위에 아프게 얹혔다. 군산 같은 항구
도시에서는 근처의 곡창 지대에서 거두어들인 거대한 쌀가마니 유출만 문제가 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미도 장 '이라는 놀음판에서 순진한 농민들은 합법적으로 수
탈당해 패가망신 하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듣도 보도 못했던 유흥과 놀음이 있던
미도 장에서 순진한 농민들은 뼈가 삭는 아픔도 모르고 빠져들었다고 한다. 땅문서
까지 빼앗기고도 유흥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니 미도장이라는 곳이 어떤
곳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으나 그 건물은 이미 헐리고 없었다.
출처http://blog.daum.net/anhaiyo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