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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복무 단축에 대한 단상

오늘어제내일 2018. 1. 29. 02:52

군 복무 단축에 대한 단상

2017.07.26

1988년 3월 7일 논산 육군 제 2훈련소에 입소하던 날, 배웅 나온 친지들과 이별을 한 후, 조교들의 안내를 받으며 연병장 모퉁이를 돌자마자 오리걸음으로 생활관까지 걸어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되기 전에 신체검사와 적성검사 등을 다시 받기 위해 가입소 기간을 보내는데, 필자의 기억에는 이 가입소 기간이 실제로 훈련을 받던 기간보다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1분 검사를 받기 위해 3시간 기다리는 건 예사였고, 예상을 뛰어넘는 비인격적인 대우에 적응하는 시간이 바로 가입소 기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입대한 날 밤에 논산 훈련소에는 때늦은 함박눈이 내렸습니다. 가입소를 했던 대대의 연병장에도 흰 눈이 소담스럽게 쌓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맛없다는 입소 다음날 아침 짬밥을 먹고난 후, 기간병들이 필자를 비롯한 입대 장병 스무 명쯤을 차출해 연병장의 눈을 치우게 했습니다. ‘눈이 왔으니 운동장에 길을 내려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눈을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군대의 특성을 잘 몰랐습니다. 길을 내려고 눈을 치우는 게 아니라 쌓인 눈을 다 치우는 게 목적이었던 겁니다. 오전 내내 땀을 뻘뻘 흘리며 연병장에 쌓인 눈을 다 치우고 나서 필자는, ‘미쳤다. 그냥 놔두면 눈이 녹고 하루 이틀 지나면 자연스럽게 땅이 마를 텐데, 왜 이 고생을 사서 시키나?’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놀리느니 일 시킨다.” 나중에 자대 배치를 받고 이때의 경험을 얘기하니 선임병이 필자에게 해준 말입니다. 놀리느니 아무 일이라도 시킨다는 것입니다. 노는 시간이 많을수록 사고의 위험이 커지고 일을 하는 동안에는 잡생각이 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혈기왕성한 사병들을 관리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놀리지 말고 아무 일이라도 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필자의 군대 생활 내내 금과옥조처럼 지켜졌습니다. 훈련 한 시간만 받아도 더러워질 군화를 30분 동안 이른바 물광, 불광을 내며 닦고, 휴가나 외박을 나갈 때는 어차피 군복 입은 사병을 아무도 봐주지 않을 텐데도 전투복을 한 시간을 넘게 각을 잡아서 다렸습니다. 훈련소의 단골 메뉴인 선착순도 실상은 놀리느니 뜀박질을 시키는 거였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문무대라는 곳에 입소해서 1주일 훈련을 했다는 이유로 45일의 복무기간을 단축 받아서 28.5개월을 복무했습니다. 그런데 필자의 생각에는 28.5개월도 너무 길었습니다. 젊음을 바쳐 조국을 위해 봉사했다는 떳떳함을 훈장처럼 간직하며 살고 있고, 친구들과 술 한잔 마실 때, “예비역 육군 병장은 대장보다 계급이 높아!”라고 억지를 부리기도 하지만, 군 복무 기간이 긴 것에 대해는 그때나 지금이나 불만이 많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군 복무 기간을 단축하겠다고 합니다. 사실 복무 기간 단축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기도 했습니다. 표를 얻으려고 할 때와 이미 표를 얻고 났을 때가 다르면, 공약을 믿고 뽑아준 국민은 절망하거나 분노합니다. 물론 복무 기간을 단축하는 문제에 대해선 찬반 양론이 존재합니다. 반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된 논거는 사병이 숙련된 군인으로서 역할을 하려면 일정 기간의 군복무가 필요한데 18개월로는 부족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예비역 육군 병장의 입장에서 볼 때, 사병으로서 군대 내에서 숙련도가 완성되는 시점은 상병 5호봉 즉, 상병 진급 후 다섯 달만 지나면 완벽하게 끝납니다. 그리고 업무의 양과 책임의 한계까지 생각하면 사병의 존재감은 군 조직에서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사병은 군조직의 말단으로서 정상적인 국방의 의무보다는 군 조직과 문화를 유지하는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용도로 쓰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필자의 군 복무 기간 중 부대가 이전을 했는데, 필자와 동기들은 그 후 두세 달을 주말마다 간부들 이삿짐을 옮겼습니다. 나중에는 이삿짐 옮기는데 이골이 나서 냉장고 하나 정도는 혼자서 들고 나를 정도로 숙련된 노동자가 되었을 정도입니다. 전쟁이 나면 부대의 냉장고를 들고 뛸 수 있을 정도로 이삿짐을 옮기는 데는 선수가 됐는데, 그것이 군 전력 증강에 얼마나 보탬이 되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공부를 잘했던 필자의 후배 중 한 명은 연대장 아들의 과외를 하면서 군복무를 마쳤다고 합니다. 사병(士兵) 아닌 사병(私兵)이었던 겁니다. 30년 전의 이야기라서 요즘에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겠지만, 지난 30년 동안 군이 사병을 바라보는 시각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요즘도 여전히 가입소 기간에 뙤약볕에 3시간을 기다려서 신원조회를 하고 2시간을 기다려서 신체검사를 한다고 합니다. 국방부 시계는 얼차례를 받는 동안에도 돌아간다고 하지만 사병의 시간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18개월로 복무기간을 단축하면 사병의 숙련도가 떨어져서 군 전력에 손실이 생긴다고 얘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필자가 군 복무를 할 때, ‘30년쯤 지나면 통일이 되어 우리 아들들은 군 복무를 할 필요가 없어지겠지’라고 막연하게 기대했었는데 그냥 기대로 끝이 났습니다. ‘우리 자식들은 이런 끔찍한 입시 전쟁을 치르지 않아도 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입시는 30년 전보다 몇 배는 더 끔찍해졌습니다. 막연한 기대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정치에 무심하고 지금 당장 사는 일에만 매달리다 보니 다음 세대가 살아갈 행복한 사회를 가꾸는 일은 남의 몫으로 돌려버린 겁니다. 그래서 지금 젊은 세대를 보면 항상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기계가 노동력을 대체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비무장지대의 GP마다 CCTV가 설치되어 사병들의 근무상황을 체크합니다. GP의 존재 이유는 첫째가 경계를 위한 것이고 둘째가 적의 도발 시 대응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같이 CCTV와 드론이 일상화된 세상에 굳이 병사가 직접 위험한 지역에서 경계 근무를 해야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군 전력에 큰 손실이 없이 장병의 수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주 월요일 아들 녀석이 입대했습니다. 이 무더위에 훈련을 받으면 하늘이 노래질 겁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랬듯이 잘 이겨내고 자랑스런 예비역 병장이 되어 군 생활을 돌아보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다만, 비록 사병이라도 군인으로서 대접받고 시간을 귀히 여기는 지휘관을 만나 보람되게 군 복무를 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정부의 공약이 빨리 이뤄져 좀 더 일찍 가족 품으로 돌아오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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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박상도

SBS 선임 아나운서. 보성고ㆍ 연세대 사회학과 졸. 미 샌프란시스코주립대 언론정보학과 대학원 졸.
현재 SBS 12뉴스 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