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의 여인
안해영
젊은 여자가 칼바람을 몰고 노래방으로 들어왔다. 며칠 동안 영상의 기온에 바람
도 없이 따뜻한 햇볕이 들었는데, 갑작스러운 추위로 몸이 더 움츠러들었다. 마음
속에 이미 봄이라는 느낌이 먼저 자리 잡고 있었나 보다. 추운 날씨에 어울리지 않
은 얇은 차림을 한 여인의 그렁그렁한 눈물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다. 집에서
입고 있던 차림으로 뛰쳐나온 듯 평상복 차림이다. 발가락을 아이젠처럼 구부린
맨발이다.
“어디 빈 방···. 아니···들어가서 함께 노래 부를 남자···없어요?” 그 행색에 남자와
함께 노래 부를 방을 찾다니.... 당황한 내 생각이 그녀를 비난하고 있었다.
“여기는 그런 곳이 아닌데요.”라는 말에 잘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빨리 방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눈빛이었다.
여인의 몸에 묻어 들어온 한기 때문인지 가게가 더 춥게 느껴졌다. 여인은 눈
을 내리깔며 발가락을 다시 오그렸다. 슬리퍼라도 신을 수 없냐고 신호를 보내
오는 듯했다. '발이 얼마나 시릴까?'라는 생각에 신발장에서 겨울용 슬리퍼를
얼른 꺼내 주었다. 슬리퍼를 신은 그녀의 동공에 금방 생기가 돌았다. 슬리퍼
를 신자마자 꼭 돌려줄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그녀는 어둠을 뚫고 추위 속으
로 사라졌다.
저녁 늦은 시간 혼자 오는 여인들의 대부분은 뭔가 석연치 않은 사연을 가슴
에 안고 있는 것 같다. 언젠가 아주 앳되어 보이던 아가씨도 펑펑 울면서 노래
를 불렀다. 울며 노래 부르는 그녀의 마음을 다칠까 조심스럽게 테이블에 티슈
를 살짝 올려놓고 나왔다. '사랑하던 연인과 이별이라도 한 것일까?' 슬픈 멜로
디만 선곡해 부르는 그녀의 노래소리에 나도 울적해졌다. '따뜻한 차라도 건넬
까?' 생각하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티슈 고맙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 장
례식을 치르고 왔거든요. 집에 있으려니 허전하여 노래라도 불러야 생전의 불
효가 풀릴 것 같아 왔어요.” 생전에 속썩여 드린 것만 생각난다며 또 울먹였다.
나도 어머니 생각이 나면 노래를 부르며 그리움을 토해내고 싶은 생각이 들 때
가 있다.
봄기운이 한창이던 날 초저녁에 예쁜 여자 두 명이 왔다. “저 알아보겠어요?”
한 여자가 주춤거리며 인사를 건네 왔다. 한참을 쳐다봐도 아는 사람 같지 않
았다. 웬만하면 기억을 하는 편인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동행을 먼저 방
으로 들여보내고 내 앞에서 머뭇거리던 여자가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전에
저에게 주셨던 슬리퍼를 못 가져왔네요.”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춥던 겨울밤
홀연히 추위 속으로 사라졌던 그녀가 화사한 봄꽃처럼 변해 알아볼 수 없었
다. 그 날 그녀의 등 뒤로 느껴지던 삶의 무게들이 가벼워진 것으로 보여 무
엇보다 반갑고 기뻤다.
그해 여름 맨발의 그녀가 가게에 다시 왔다. 노래를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멀리 떠나게 되어 인사차 들렀단다. 평택으로 가는데 언제 올지 모르겠다며
이곳은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이라고 했다. 한동안 마음이 아주 아팠는데 홀
로서기를 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이 안정되어 의류가게를 평택에서 운영하게
되어 떠난다고 했다.
지난 명절 가게에 가끔 오는 커플과 그녀가 함께 왔다. 깜짝 놀라 어떤 사이
냐고 물으니 초등학교 동창이라고 했다. 그녀는 세 사람이 마시기에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음료를 주문했다. 음료값을 내던 그녀 친구가 핀잔하는데 나
를 바라보는 그녀 눈빛에 알 수 없는 표정이 서렸다. 슬리퍼를 건네주던 날에
대한 우정 같은 표정으로 느껴졌다.
그 추웠던 날 맨발로 아이젠 같은 발가락을 차가운 땅바닥에 꽂고 있다가 건네
준 슬리퍼를 신고 황급히 나갔던 여인. 그 날 왜 그렇게 슬픈 모습의 맨발로 왔었
냐는 말은 끝내 물어보지 않았으나, 홀로 자신을 세워가는 모습에서 미루어 짐작
할 수 있었다.
여자들은 맨발의 여인 같은 슬픈 사연을 안고 있으면서도 감추고 사는 경우가
많다. 겨울날의 맨발처럼 차갑고 한스러운 사연을 안고 혼자 오는 여인들의 대
부분은 마음에 쌓인 슬픔을 노래를 부르면서 풀어낸다. 주인인 나도 가슴에 한
이 스밀 때는 노래가 부르고 싶어진다.
(2016. 06월 동서문학 12집 '나무로 만든 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