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티’에 대한 해명 / 임보
어느 문학행사에 다녀온 문우가
체험담이라며 내게 슬쩍 귀띔을 한다
……어쩌다 ‘임보’의 얘기가 나왔는데
‘임보’를 잘 모르는 시인이 있어
「팬티」의 작자라고 일렀더니
고개를 끄덕이더라는 것이다
「팬티」가 ‘임보’보다 유명하다니
어쩐지 좀 개운치가 않다
어느 여류의 「치마」라는 시를 읽다
장난삼아 쓴 「팬티」인데 재미있는지
인터넷에 떠돌아다닌다는 소문이다
세상이 내 글을 아낀다는 것은
싫지 않는 일이긴 하지만
이러다 「팬티」가 내 대표작이 되어
‘팬티의 시인’으로 기억되면 어떡하지?
사람들아,
‘임보’는 「팬티」보다 더 기똥찬(?) 작품들을
수도 없이 써낸 풍류 시인임을 모르시는가?
내 말이 믿기지 않거든
당장 임보의 시집 한 권 구해 읽어 보시라
「팬티」가 결코 그를 대표할 작품이 아님을
금방 깨닫게 되리니……
치마 / 문정희
벌써 남자들은 그곳에
심상치 않은 것이 있음을 안다
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기는 있다
가만두면 사라지는 달을 감추고
뜨겁게 불어오는 회오리 같은 것
대리석 두 기둥으로 받쳐 든 신전에
어쩌면 신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는
흥망의 비밀이 궁금하여
남자들은 평생 신전 주위를 맴도는 관광객이다
굳이 아니라면 신의 후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자꾸 족보를 확인하고
후계자를 만들려고 애를 쓴다
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다
여자들이 감춘 바다가 있을지도 모른다
참혹하게 아름다운 갯벌이 있고
꿈꾸는 조개들이 살고 있는 바다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죽는
허무한 동굴?
놀라운 것은
그 힘은 벗었을 때 더욱 눈부시다는 것이다.
팬티 / 임보
- 문정희의「치마」를 읽다가
그렇구나.
여자들의 치마 속에 감춰진
대리석 기둥의 그 은밀한 신전.
남자들은 황홀한 밀교의 광신들처럼
그 주변을 맴돌며 한평생 참배의 기회를 엿본다
여자들이 가꾸는 풍요한 갯벌의 궁전,
그 남성 금지구역에 함부로 들어갔다가 붙들리면
옷이 다 벗겨진 채 무릎이 꿇려
천 번의 경배를 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곤욕이 무슨 소용이리
때가 되면 목숨을 걸고 모천으로 기어오르는 연어들처럼
남자들도 그들이 태어났던 모천의 성지를 찾아
때가 되면 밤마다 깃발을 세우고 순교를 꿈꾼다
그러나, 여자들이여. 상상해 보라
참배객이 끊긴.
닫힌 신전의 문은 얼마나 적막한가!
그 깊고도 오묘한 문을 여는
신비의 열쇠를 남자들이 지녔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보라.
그 소중한 열쇠를 혹 잃어버릴까 봐
단단히 감싸고 있는 저 탱탱한
남자들의 팬티를!
팬티와 빤스 / 손현숙
외출을 할 때는 뱀이 허물을 벗듯
우선 빤쓰부터 벗어야 한다
고무줄이 약간 늘어나 불편하지만, 편안하지만,
그래서 빤쓰지만 땡땡이 물무늬 빤쓰
집구석용 푸르댕댕 빤쓰는 벗어버리고
레이스팬티로 갈아입어야 한다
앙증맞고 맛있는 꽃무늬팬티 두 다리에 살살 끼우면
약간 마음이 간지럽고 살이 나풀댄다
나는 다시 우아하고 예쁜 레이스공주
밖에서 느닷없이 교통사고라도 당한다면
세상에, 땡땡이 빤쓰인 채로 공개되면 어쩌나
비싼 쎄콤장치로 만약의 위험에 대비하듯
유명 라펠라 팬티로 단단한 무장을 한다
오늘 바람이라도 살랑, 불라치면
혹시라도 치마가 팔랑, 뒤집힌다면
나 죽어도 꽃무늬 레이스로 들키고 싶다
옳거니 / 정성수
- 문정희 시인의 「치마」와 임보 시인의「팬티」를 읽고
치마를 올릴 것인지? 바지를 내릴 것인지?
이것이 문제로다
그렇다
세상의 빨랫줄에서 바람에게 부대끼며 말라가는 것 또한
삼각 아니면 사각이다
삼각 속에는 *대리석 두 기둥으로 받쳐 든 신전이 있고
사각 속에는 *그 깊고도 오묘한 문을 여는 신비의 열쇠가 있다고
문정희와 임보가 음풍농월 주거니 받거니
진검 승부를 펼친다
옳거니
방패 없는 창이 어디 있고
창 없는 방패가 무슨 소용이리
치마와 바지가 만나 밤은 뜨겁고 세상은 환한 것을
* 문정희와 임보 시에서 차용
치마와 팬티 / 이수종
- 문정희 시인의 「치마」와 임보 시인의「팬티」를 읽다가
치마속 신전에는 달을 가리고
숨겨주는 창이 있다
바람을 빨아들이는 들창 주위를 서성거리며
은밀히 숨겨진 비밀을 열고 싶어
사내들은 신전가는 길목에서
치마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영역싸움을 벌인다
거기서 이기면 다 되는가
그건 일차 관문에 지나지 않는
창들끼리의 다툼일뿐
방패를 뚫고 침입하는
선택받은 승자의 개선을 위해서는
목숨을 건 더 큰 한판 승부가 남아 있다
사내의 완력만으로는 성문을 열 수 없다
문열려라 참깨하고
주문을 외우며
사내들은 치마앞에서
치마성의 주인과 내통하는
카드 비밀번호를 맞춰 보아야 한다
성주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는 구도자의 인내도 필요하고
계관시인의 음유도 필요하고
말 탄 백기사의 용맹도 있어야 되지만
힘하나 안들이고 성문을 열고 맞아들이는 경우도
아주 드물게 더러는 있어
치마앞에서는 여간 근신하며 공을 드려야 하는게 아니다
그래서
치마는 딱 한번 열렸다 닫히고
더 이상 끄떡도 하지 않은 채
폐쇄되는 경우가 다반사인 것이다
창은 방패를 이길 수 없고
방패는 창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다
힘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이다
- 이수종 시집 < 시간여행 >
죽고 난 뒤의 팬티 / 오규원
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만 가까워져도 앞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자(者)도 아닌 죽은 자(者)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득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울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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