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면에 올려진 글 모음

소리 (안해영)

오늘어제내일 2018. 9. 5. 02:22


소리 : 한국산문 2018. 08월호 안해영






소리

                                                                                안해영

  가로수 그늘 따라 걷고 있다가 귀청을 찢을 듯한 매미 울음소리에 놀

라 넘어질 뻔했다. 정신 줄을 놓고 걸었나 보다. 매미의 울음소리는 잦아들

지 않았다. 도시의 매미들은 왜 이처럼 악을 쓰며 울어대는 것일까? 무심

가로수 잎들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머리 위에서 하늘거리며 그늘을

내리고 있었다.

  소리는 저마다의 존재를 드러낸다. 매미 울음소리에 놀라니 일상에서

조금은 생소했던 소리가 들린다. 어릴 적 늦잠이라도 잘라치면 어김없

이 들리는 아버지의 호통은 아침잠 속으로 젖어 드는 졸음을 쫓기 일쑤였

다. “해가 중천에 떴다. 어서들 나오너라.” 눈을 비비며 툇마루에 쪼그리

고 앉아 해를 쳐다보아도 중천은커녕 어스름한 동이 터오고 있을 뿐이었

다. 아버지는 목소리가 커서 별명이 ‘왜가리’였다. 왜가리 울음소리는 해

가 넘어가는 해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곱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대한 부러움이 내 마음 한쪽에 숨어있었다.

노래를 잘 부른다거나 사근사근한 호소력 있는 목소리가 부러웠다. 투박

하고 볼멘 듯한 내 목소리는 상대방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종

종 있다. 무의식적으로 건네는 말이 불만스러운 투로 들린다는 말을 가끔

듣는다. 툴툴거리는 소리로 들릴까 봐 나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

는 곳에서는 말을 아낀다.

고등학교 때 전교생을 대상으로 어버이날을 기념하는 공모 글에 <카네

이션>이라는 내 시가 당선되었다. 시 낭송이 교내 방송을 타던 날 나는 정

작 낭송을 못 했다. 투박한 저음의 목소리가 시의 느낌을 표현하지 못한

다고 방송반 선생님은 교내 아나운서가 대신 낭독하도록 했다. 얼마나 서

운하던지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어린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나 섬에서 도시로 전학 가던 날 여객선의 뱃

고동 소리는 내 맘속의 슬픔을 대신했다. ‘부웅~’ 뱃고동이 울리면 조용

하던 선창과 갑판엔 일순 긴장감이 돌았다. 흰 옥양목 치마저고리를 입고

머리에 썼던 흰 수건을 벗어 흔들던 어머니. 뱃전은 위험하니 객실로 들

어가라며 떠나보내는 허전함을 수건에 묻혀 흔들었다. 잠시라도 어머니

를 더 보려고 난간에 매달리던 간절함을 뱃고동 소리가 대신 메워주었다.

눈가에 그렁그렁 맺히는 슬픔을 대신한 뱃고동 소리였다. 긴 여운을 남기

며 파도에 휘감기던 뱃고동의 애절함을 느낄 새도 없이 배는 바다를 가르

며 떠났다.

  서울로 가던 날 처음 들은 기차의 긴 기적 소리는 그윽한 소리는 아니

었으나 마음을 흔드는 슬픔을 담고 있었다. 거친 소리로 떠드는 사람한

테 ‘기차 화통 삶아 먹은 소리’ 같다고 했지만 내 귀에는 구슬프게만 들렸

다. 기차를 타던 날 기적 소리보다는 ‘칙칙폭폭 칙칙폭폭’ 선로 위를 구르

는 기차 바퀴 소리에 묻혀 마음이 질질 끌려가는 듯했다. 차창으로 스치

는 경치를 뒤로 밀어내던 기차 바퀴가 먼 세계로 데려가 버릴 것 같은 불

안함 때문이었다. 종착지인 서울에서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가

슴이 두근댔다.

  도시 도로의 큰 소리는 어떤가? 내가 먼저라고 외치는 듯 달리는 소방

차와 급박하고 당황스러운 구급차의 구명 소리. 굉음을 내며 도로를 달리

는 오토바이 폭주족들의 도시 거리를 고문하는 소리는 깜짝깜짝 놀라게

하며 궁금증과 불안감을 느끼게 한다. 여름날 며칠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어대는 매미의 울음소리 또한 도시의 소음 공해로 떠오르고 있다. 매연

에 시달리는 가로수의 그늘은 매미에게 썩 좋은 환경이 아니다. 매미 울

음소리는 도시 소음 속에서 생명의 영속성을 알리는 삶의 처절한 소리다.

  매미의 애벌레는 7년여의 세월을 땅속 나무뿌리에서 수액을 먹고 자란

다. 성충이 되어 밖으로 나오면 다른 나무로 가지 않고 자신이 수액을 빨

았던 나무에 머문다. 짝짓기 구애의 울음소리는 생명줄이 되어준 나무에

서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 울려 퍼지고 있다. 사람도 세상에 생명

의 알림을 첫울음 소리로 알리지 않던가? 매미의 울음이 도시의 공해로

리지만, 나무는 새 생명을 이어갈 울음에 짐짓 경건함으로 대하는지도 모

른다.

  고향 집 마당에 있던 ‘멀구슬나무’도 한여름 매미들의 합주회가 열리는

곳이었다. 수컷들의 테너와 바리톤 합창쯤이었을까? 매미의 종류에 따라

울음소리의 높낮이가 달랐다. 그 시절 매미들은 지금처럼 자동차 소음을

이겨 내려고 악을 쓰며 울지 않았다. ‘쓰르름’ 합창을 하던 매미 울음소리

스르르 책을 내려놓으며 툇마루에서 낮잠을 청하기도 했다. 조용한

농촌에서의 매미 울음소리는 낮잠을 청하는 자장가로 손색이 없었다. 도

시의 그악스러운 매미 울음소리는 복잡한 도시의 일상에서 정신 줄을 놓

지 말라는 경고를 보낸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안해영

전남 신안 출생

한국산문 등단

한국산문작가협회 회원

anhaiyoung@daum.net

 지난해에는 친구가 보내준 매실즙을 맛있게 먹었는데, 올해는 매실

주를 조금 담가 보았다.


'지면에 올려진 글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안문학(2018)  (0) 2018.12.28
소라의 노래  (0) 2018.12.28
외갓집  (0) 2017.09.16
선수필- 감-  (0) 2017.09.01
힐링의 섬<시와 수상문학 2017 여름호>안해영  (0) 2017.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