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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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어제내일 2022. 11. 23. 01:17

구시나무 찬장

안해영

어머니는 부엌에서 살다시피 했다.  아궁이 세 곳에 불을 지피 면서 한쪽에서는 막걸리를 거르며
아버지의 술상과 식구들 밥상을 동시에 차려 내던 빠른 손이었다. 음식을 잘 만들던 손맛 덕분에 어머니는 더 바빴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바쁘게 움직여도 아버지의 까다로운 입맛과 불같은 성질 앞 에서는 대책이 없었다. 밥상이나 술상이 즉시 차려지지 않으면 불 호령이 떨어지곤 했다.

  어느 여름 점심 때가 거의 되었을 무렵 외출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부엌을 기웃기웃 들여다 보며 엄마를 찾았다. 아버지의 눈치를 보던 나는 얼른 밭으로 뛰어가 엄마를 불렀다. 엄마를 보자마자
아버지는 화를 냈다. ‘때가 되면 식사를 챙겨야지 들에만 있으면 어떡하느냐.’는 것이다. 아버지
는 점심 식사 때면 막걸리 반주를 했는데 밥상보다 술상을 먼저 받은 아버지는 버럭 화를 내더니
술 사발을 냅다 부엌으로 던졌다. 식사 준비를 하던 엄마는 술사 발을 피하느라 나무 청에 쓰러졌
다. 엄마를 부축하던 놀란 어린 가슴에 아버지가 남처럼 보였다. 밥상보다 술상이 먼저 차려진 것
이 화근이었을까? 아버지가 술 사발을 던진 것은 막걸리 맛이 묽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너무 시장한 상태에서 술을 먼저 마셔 취기가 돌아 아버지의 입맛이 술맛을 제대로 못 느낀 것인지? 아버지의 화를 풀어 드릴 생각에 간단한 술상을 급하게 먼저 차린 엄마의 손맛이 살짝 비껴간 것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어머니만의 공간이었던 부엌은 변변한 장식도 없이 거무튀튀 했다. 특히 그릇을 얹어 놓는 선반은 문도 없었다. 아궁이에 불을 땔 때 나오는 그을음이 그대로 그릇 위에 내려앉았다. 부엌 바닥은 검은 흙으로 콘크 리트보다 더 단단했으며 아궁이 옆은 땔감용 나무가 수북한 나무 청이 있었다. 닭장을 뒤 곁에 따로 만들기 전에는 암탉이 부엌의 나무 청에서 알을 낳고 꼬꼬댁 거리며 밖으로 나오곤했다. 그런 부엌에 나뭇결을 살린 노란 삼 층 찬장이 들어앉았다.

  가을이면 손가락마디 크기의 호박 구슬 같은 열매를 나무 줄 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달던 ‘멀구슬나무’가 아래 마당에서 위 마당으로 올라오는 곳에 있었다. 봄이면 보라색 꽃이 피고 여름엔
초록 열매를 매달던 멀 구슬은 가 을이면 야릇한 화장실 냄새를 풍 기며 노란색이 되었다. 야릇한
냄새와 쌉싸래한 맛은 해충을 쫓는 방충제와 구충제 역할을 했다. 가끔 배앓이라도 할 때 노란
열매는 쌉싸래한 맛으로 통증을 달래주는 약이 되기도 했으니까. 우리는 멀구슬나무를 구시나무라 불렀고 동네 사람들은 우리 집을 구시나무집이라 불렸다. 집채 보다 커버린 아름드리 구시나무 아래는 나뭇잎 따먹기나 땅따먹기 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놀이터였고 어른들의 쉼터였다.   그런 구시 나 무가 넓은 마당을 갖기 원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잘리게 되었 다. 나무를 베지 않으면 두 마당을 합해도 넓은 마당이 될 수 없는 어 중간한 위치에 자리한 것이 문제 였다. 초가 지붕에 그늘을 만들어 비에 젖은 이엉이 빨리 마르지 않 는 것도 아버지의 결심을 거들게 한 큰 이유였다. 그뿐이 아니고  동네 사람들이 나무 아래서 시끄 럽게 노는 것을 못마땅해 하기도
했다. 이런 문제들은 두 마당을 합 하기 위해 아름드리나무를 베는데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구시나무가 잘리던 날 나무의 울 음 소리는 온 동네를 휘감으며 산 등성이를 타고 넘어갔다. 나무가 자라면서 가졌던 나무만의 역사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세월이 된 듯했다.

  아버지의 뜻으로 베어진 나무는 처마 밑에 누워  빗물 떨어 지는 소리를 들으며 마르고 삭아가며 진을 뺐다. 아버지는 나무의 용도 를 찾느라고 집 여기저기를  휘둘 러보곤 했다. ‘대청마루를 다시 놓
아 볼까?’ ‘툇마루를 고쳐 볼까?’ 가족과 상의도 했다. 어머니에게 술 사발을 던지던 날의 아버지 행 동에 남이 아닌가 하고 내 마음에 틈을 두었듯이 나무는 마르는 과 정에서 이리저리 터지며 틈이 생 겼다.

  틈이 생기는 나무를 보며 아무래 도 대청마루나 툇마루 용은 안 될 것 같다면서도  용도를 선뜻 정하 지 못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마당 이 구시나무 조각으로 가득했다. 터지고 갈라진 부분을 빼고 나니 넓고 긴 판이 예상대로 몇 개 안 되었다. 그렇게 큰 아름드리나무 의 토막을 보며 식구들도 몹시 속 상해했다. 아버지는 집도 짓는 최 목수의 실력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오동나무에 버금가는 재목 감이기를 바랐던 기대가 깨진 실 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무 조각 들을 보며 아버지는 젊은 시절의 꿈들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조각 조각 잘려나갔던 것 같은 느낌을 갖지는 않았을까? 나무의 특성을 잘 알지 못했던 아버지 '전문가가 그것도 몰랐냐?’ 며 최 목수를 나무랐지만 이내 결심을 한 듯 했다. 어머니가 부엌 선반을 늘 불편해하는 것을 생각하셨을까? 목수를 데리고 부엌을 몇 번 왔다 갔다 했다. 아버지는 작은 나무판 들을 들었다 놓았다 하더니 그릇 을 올려놓은 선반을 없애고 찬장 을 짜기로 했다.

  나무판은 노란 속살 구불구불한 선의 나이테로 세월의 흔적을 품은  문양으로 멋이 풍겼다.
미닫이 문을 달고 노란색 삼 층 찬 장이 되어 선반이 있던 자리에 앉 았다. 어머니의 부엌에 아버지가 만들어 준 노란색 구시나무 삼 층 찬장이 들어선 것이다. 가을이면 노랗게 익었던 열매처럼 노란색 찬장이 거무튀튀한 부엌을 환하게 했다. 노란 찬장은 어머니가 아버 지로부터 받은 최초의 선물은  아 니었을까? 동네 사람들도 신식 찬 장 구경을 하느라고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미닫이문을 밀어도 보고 두드려도 보고 감탄 을 연발했다.

  찬장은 지지대 위에 앉아 뒤뜰의 작은 항아리들을 품었다. 막걸리 술 항아리도 찬장 아래 한자리 했다. 층 별로 식 그릇과 양념 단지 들이 제격에 맞는 자리를 맡았다. 요즘의 찬장보다 더 튼튼 했으며 천연 나이테를 세월의 흔적으로 간직한 원목 찬장은 오래도록 부엌을 지켰다.

  어머니 팔순 잔치에 고향 집에  갔는데  초가집은 슬레이트 지붕 과  양철 처마를 단 새마을 집으
로 변해 있었다. 집 중앙에서 키가 큰 여닫이 문을 하고 있던 부엌 문 도 , 검고 단단했던 흙바닥 부엌도 없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매캐한 냄새와 그을음을 내던 따끈한 부뚜막도 없었다. 아버지가 던진 술사발을 피하려다 어머니가 쓰러졌고 암탉이 알을 낳던 나무 청도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이십여 년이 흐른 집은  조용했다. 엄하고 까다로워 남처럼 느껴졌던 아버지의 깊은 속뜻으로 만들어졌을 노란 구시나무 찬장이 없어진 것이 무엇보다 아쉬웠다. 신식 멋과 기능을 갖고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을 유일하게 느낄 수 있었던 노란 구시나무 찬장이 어머니의 부엌을 빛내준 추억만 남았다.
(2014.12. 15  리더스 에세이 대표 문집 -도란도란 아작아작 행복의 샘 부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