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고무신
안해영
오랜만에 굽이 높은 구두를 신은 외출이었다. 결혼식 하객으로 가느라고 정장
차림에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멋을 부린 것이 화근이었다. 한 발짝도 옮길 수 없
는 상황이 되었다.
결혼식장이 있는 역에 도착하여 계단을 오르는데 발걸음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발
이 아파 왔다. 아픈 발을 끌고 한 발짝 내딛는 데 일 분씩 걸리는 느낌이었다. 결혼
식에 늦지 않으려는 조급한 마음까지 보태져서 구두가 발을 더 옥죄는 듯했다. 지하
철역 주변을 둘러보니 구두 가게가 보였다. 덤핑 물건을 취급하는 곳이라 거의 작은
것뿐이었는데 발 크기에 맞을 만한 신이 눈에 들어왔다. 구두가 아닌 고무신이라 해
야 맞을 것 같은 재질이었다. 진한 물색의 구멍이 숭숭 난 고무신에 금속 리본 장식
이 앞 코에 붙어 화려해 보였다. 힐을 벗고 고무신을 신으니 날아갈 듯 발이 편했다.
가격이 생각보다 좀 비싼 듯했지만, 발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니 신이 제 주인을 만
난 셈이다. 발을 아프게 한 번지르르한 굽 높은 힐은 보조 가방에 넣었다.
어릴 적 나는 친구들처럼 예쁜 꽃고무신을 신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꽃신은 쉽게
찢어지고 색이 바래면 보기 싫다며 튼튼한 검정 고무신만 사 주었다. 자갈밭 비탈진
산길을 넘어 학교 가는 길은 꽃신이 어울리지 않기는 했다. 두껍고 투박한 검정 고무
신이 제격이었다. 그래도 예쁜 꽃신은 신고 싶었다.
아버지는 어머니한테도 꽃신을 사준 적이 없었다. 어머니의 신은 하얀 코고무신이
었다. 부모님이 외출에서 돌아오거나 신을 일이 없어 보관할 때는 흰 고무신 두 켤레
를 깨끗하게 닦아 댓돌 위에 엎어서 말리곤 했다. 지푸라기를 뭉쳐 만든 수세미에 비
누를 묻혀 닦으면 하얀 고무신은 반짝반짝 윤이 났다. 아버지의 흰 고무신과 어머니의
흰 코고무신 두 켤레가 같이 있으면 다정해 보였다. 모든 일을 아버지가 주관하는 집에
서 고무신 두 켤레가 가지런히 댓돌 위에서 햇살을 받으면 두 분이 같은 위치에 있는 듯
해 보였다.
어머니라고 꽃신이 신고 싶지 않았으랴. 어머니도 속으로는 꽃신을 신고 싶어 할 것 같
아 대신 아버지에게 청해 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묵살 당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보다
생활이 어려운 집도 여자들은 꽃신을 신고 다니는데 헛된 허영심이라고 하였다. 쌀밥은
커녕 보리밥도 제대로 못 먹으면서 실용적이지 않은 꽃신을 신고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아버지의 반응은 꽃신을 포기하게 하였다. 어려운 농촌 생활에 꽃신은 산지기 집의 거문
고나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와 같은 것이라며 고개를 저으셨다.
고무신을 신고 비가 오는 자갈밭 비탈길을 오르내리다 보면 꽃신이나 검정 고무신이나
미끄러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돌부리에 걸려 찢어지기라도 하면 낭패였다. 바닥과 덮개의
이음새 부분이 찢어지면 신은 발목 중간에 걸리고 발은 삐져나오면서 상처가 나고 삐는 경
우도 있었다. 신 안으로 물이라도 들어오면 질퍼덕거리면서 뽀드득 소리가 날 때의 느낌이
싫어 신을 허리춤에 묶고 맨발로 걷기도 했다. 하이힐이 보도블록 사이에 껴 힐 뒤축이 부러
지면 구두를 벗고 맨발로 걷는 것과 흡사했다. 찢어진 신과 발 사이로 흙이나 자갈이 들어와
발가락에 끼는 일도 있어 헌 신을 오려 내어 꿰매 신을 때도 있었다. 알뜰함이 몸에 배어 올이
나간 스타킹을 꿰매다가 깜짝 놀라곤 한다. 어릴 적 습관이 몸에 밴 것 같아서.
하학 길 개울가에 엎드려 검정 고무신으로 송사리 잡는 재미에 푹 빠지기도 했다. 남학생들이
여학생들을 개울물에 밀어 넣고 도망가도 송사리를 쫓으며 노는 것이 재미있었다. 이리저리 도
망가는 송사리 떼를 쫓아 엎어지고 뒤집어지면서 옷이 젖어도 즐겁기만 했다. 어항이 된 검정
고무신에는 송사리가 가득했다. 고무신 속 송사리는 커서 큰 붕어가 되었겠지? 추억의 고무신
때문이었는지 어린 시절 송사리 떼까지 생각났다.
작은 구멍들이 숭숭 뚫린 굽 낮은 고무신이 몸을 편하게 해 주다니. 굽이 높아야 격이 있어 보
이는 줄 알았던 신. 격보다 편함이 우선이었다. 게다가 밖과 안의 소통으로 통풍이 잘되니 시원
하기까지 했다. 굽 높은 구두를 신고 뒤뚱거리는 멋 부린 발들이 불안해 보였다. 꽃고무신은 아
니었지만, 발을 편안하게 해 준 굽 낮은 고무신에 추억 하나 얹으니 예식장으로 가는 발걸음이
사뿐했다. <한국산문 2017. 6월호>
전남 신안 출생
한국산문 등단(2016)
한국산문작가협회 회원
anhaiyoung@daum.net
근황: 봄인가 했는데, 어느새 여름 같은 더위다. 마음도 덩달아 바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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